“전체” 에 대한 검색결과 (총 1,993건)
표제어(348건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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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동언(朴東彦)
조선 선조(宣祖) 때의 문신. 본관은 반남(潘南). 반성부원군(潘城府院君) 박응순(朴應順)의 아들이고, 선조의 비(妃)인 의인왕후(懿仁王后)의 동생. 임진왜란(壬辰倭亂)이 일어나자 강원도 소모사(江原道召募使)로 활약하였고, 봉산 군수(鳳山郡守) 등을 지냄.
1553~1605 한국>조선후기 , 서울 , 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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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동열(朴東說)
조선 선조(宣祖)~광해군(光海君) 때의 문신. 본관은 반남(潘南). 이항복(李恒福)과 교유했고, 폐모론(廢母論)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반대했음. 시문(詩文)에 능하였고 경사(經史)와 백가(百家) 및 국조의 고사에 두루 통하였음.
1564~1622 한국>조선후기 , 서울 , 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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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미(朴瀰)
조선 선조(宣祖)~인조(仁祖) 때의 문신ㆍ문인. 본관은 반남(潘南)으로, 정안옹주(貞安翁主)와 혼인하여 금양위(錦陽尉)에 봉해짐. 장유(張維)ㆍ정홍명(鄭弘溟)과 교유하였고 서도에 일가를 이룸.
1592~1645 한국>조선후기 , 서울 , 인명>문사>문인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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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선장(朴善長)
조선 선조(宣祖)~광해군(光海君) 때의 문신ㆍ학자. 본관은 무안(務安). 남몽오(南夢鰲)의 문인으로, 예안 현감(禮安縣監)ㆍ경상 도사(慶尙都事) 등을 지냄.
1555~1616 한국>조선후기 , 경상도>영천(榮川)ㅣ서울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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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세당(朴世堂)
조선 현종(顯宗)~숙종(肅宗) 때의 문신ㆍ학자. 본관은 반남(潘南)으로, 이조 참판 박정(朴炡)의 아들. 실학자로서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(博物學)의 학풍을 이룩하였으며, 《사변록(思辨錄)》을 저술하여 주자학(朱子學)을 비판함.
1629~1703 한국>조선후기 , 서울ㅣ전라도>남원ㅣ경기도>양주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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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세채(朴世采)
조선 효종(孝宗)~숙종(肅宗) 때의 문신ㆍ성리학자. 김상헌(金尙憲)ㆍ김집(金集)에게 수학하고, 이이(李珥)ㆍ성혼(成渾)의 문묘배향을 주장함. 예송논쟁(禮訟論爭) 때 기년설(朞年說)을 지지하고 많은 저서를 남김.
1631~1695 한국>조선후기 , 서울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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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숭원(朴崇元)
조선 명종(明宗)~선조(宣祖) 때의 문신. 본관은 밀양(密陽).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여 선조로부터 보검(寶劍)을 하사받고 도승지를 거쳐 한성부 판윤(漢城府判尹)에 올랐음. 호성공신(扈聖功臣)에 책록됨.
1532~1593 한국>조선후기 , 서울 , 인명>기타인명>공신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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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승종(朴承宗)
조선 선조(宣祖)~인조(仁祖) 때의 문신. 본관은 밀양(密陽)으로, 선교랑(宣敎郞) 박안세(朴安世)의 아들. 윤인(尹訒)ㆍ이인경(李寅卿) 등이 인목대비(仁穆大妃)를 죽이려 할 때 인목대비를 보호하였고, 폐모론(廢母論)을 반대함.
1562~1623 한국>조선후기 , 서울 , 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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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응복(朴應福)
조선 명종(明宗)~선조(宣祖) 때의 문신. 본관은 반남(潘南). 사간(司諫)을 지낸 박소(朴紹)의 아들로, 유조순(柳祖詢)ㆍ성제원(成悌元)ㆍ이중호(李仲虎)의 문인.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였고, 정유재란 때 왕비를 수안(遂安)까지 호송함
1530~1598 한국>조선후기 , 경상도>합천ㅣ서울 , 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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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응인(朴應寅)
조선 명종(明宗)~선조(宣祖) 때의 문신. 본관은 반남(潘南). 유조인(柳祖訒)의 문인. 지제교(知製敎) 박소(朴紹)의 아들로, 상의원 정(尙衣院正)ㆍ인의(引儀) 등을 지냄. 작은 아버지 박집(朴緝)에게 입양됨.
1532~1606 한국>조선후기 , 서울 , 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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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제가(朴齊家)
조선 정조(正祖)~순조(純祖) 때의 실학자. 시문 사대가(詩文四大家)의 한 사람으로, 박지원(朴趾源)ㆍ이덕무(李德懋)ㆍ유득공(柳得恭) 등과 함께 북학파(北學派)를 이룸. 저서에 《북학의(北學議)》ㆍ《정유고략(貞蕤稿略)》 등이 있음. 춘당대 무과(春塘臺武科)에 장원하여 오위장(五衛將)ㆍ영평 현감(永平懸監) 등을 지냄.
1750~1805 한국>조선후기 , 서울ㅣ경상도>밀양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문사>문인ㅣ인명>관인>무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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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지원(朴趾源)
조선 영조(英祖)~순조(純祖) 때의 문신ㆍ학자ㆍ문인. 청(淸) 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(北學派)의 영수로 이용후생(利用厚生)의 실학을 강조했으며,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(漢文小說)을 발표함.
1737~1805 한국>조선후기 , 경기도>개성ㅣ서울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문사>문인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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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수(金睟)
조선 선조(宣祖)~광해군(光海君) 때의 문신. 이황(李滉)의 문인(門人)으로, 선조 때 《십구사략(十九史略)》을 개수(改修)하여 주를 붙임.
1547~1615 한국>조선후기 , 경상도>안동ㅣ서울 , 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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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수증(金壽增)
조선 효종(孝宗)~숙종(肅宗) 때의 문신ㆍ학자. 김상헌(金尙憲)의 손자. 기사환국(己巳換局)으로 동생 김수항(金壽恒)이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화음동(華蔭洞)으로 들어가 은둔함. 성리학(性理學)에 조예가 깊음.
1624~1701 한국>조선후기 , 강원도>춘천ㅣ서울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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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수항(金壽恒)
조선 효종(孝宗)~숙종(肅宗) 때의 문신. 본관은 안동(安東). 김상헌(金尙憲)의 손자로 가학(家學)을 계승하고 송시열(宋時烈)과 교유함. 노론의 영수로서 기사환국으로 인한 남인의 재집권 때 사사됨. 시문에 뛰어나고 그의 변려문(騈儷文)은 당대 제일로 꼽힘.
1629~1689 한국>조선후기 , 서울 , 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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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수흥(金壽興)
조선 효종(孝宗)~숙종(肅宗) 때의 문신ㆍ학자. 본관은 안동(安東). 영의정(領議政)을 지냈으나 기사환국(己巳換局) 때 장기(長鬐)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음. 저서에 《퇴우당집(退憂堂集)》 5책이 있음.
1626~1690 한국>조선후기 , 경상도>장기ㅣ서울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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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양행(金亮行)
조선 영조(英祖)~정조(正祖) 때의 문신ㆍ학자. 본관은 안동(安東). 민우수(閔愚洙)의 문인으로, 형조 참판(刑曹參判) 등을 지냄. 성리학과 예학에 조예가 깊고, 이우신(李友信)ㆍ민치복(閔致福)ㆍ박준원(朴準源) 등을 배출함.
1715~1779 한국>조선후기 , 서울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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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용겸(金用謙)
조선 영조(英祖)~정조(正祖) 때의 문신. 본관은 안동(安東)으로, 김창즙(金昌緝)의 아들. 이재(李縡)와 박필주(朴弼周)에게 경서(經書)와 예서(禮書)를 배웠으며, 동지돈녕부사(同知敦寧府事) 등을 지냄.
1702~1789 한국>조선후기 , 서울 , 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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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우명(金佑明)
조선 인조(仁祖)~숙종(肅宗) 때의 문신ㆍ외척. 영의정 김육(金堉)의 아들이며, 현종(顯宗) 비(妃)인 명성왕후(明聖王后)의 아버지. 같은 서인(西人)이었던 송시열(宋時烈)과 대립하여 한당(漢黨)의 중진이 되어 남인인 허적(許積)에 동조하였으나, 남인과의 알력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함.
1619~1675 한국>조선후기 , 서울 , 인명>관인>문신ㅣ인명>왕실>인척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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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원행(金元行)
조선 영조(英祖) 때의 문신ㆍ학자. 본관은 안동(安東). 이재(李縡)의 문인으로, 신임사화(辛壬士禍) 때 종조(從祖) 김창집(金昌集)이 사사되고 일가가 모두 유배된 후 벼슬을 사양하고 성리학에 전념함.
1702~1772 한국>조선후기 , 서울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