“전체” 에 대한 검색결과 (총 1,249건)
표제어(201건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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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수광(李睟光)
조선 선조(宣祖)~인조(仁祖) 때의 문신ㆍ학자. 본관은 전주(全州). 이조 판서(吏曹判書) 등을 지내고, 사신으로 여러 차례 명(明) 나라에 왕래하면서 천주교 지식과 서양 문물을 소개하여 실학(實學) 발전의 선구자가 됨.
1563~1628 한국>조선후기 , 전라도>전주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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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재(李縡)
조선 숙종(肅宗)~영조(英祖) 때의 문신ㆍ학자. 본관은 우봉(牛峯). 김창협(金昌協)의 문인으로, 노론(老論)의 중심인물로 활약함. 정미환국(丁未換局) 이후 용인(龍仁)의 한천(寒泉)에 거주하며 학자를 양성하고 《사례편람(四禮便覽)》 등을 저술함.
1680~1746 한국>조선후기 , 경기도>용인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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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정형(李廷馨)
조선 선조(宣祖) 때의 문신ㆍ학자. 본관은 경주(慶州). 이탕(李宕)의 아들이며, 정윤희(丁胤禧)의 문인. 성리학(性理學) 등 다방면에 밝고, 이원익(李元翼)ㆍ이호민(李好民)ㆍ이수광(李睟光) 등과 교유하였으며, 이조 참판 등을 지냄.
1549~1607 한국>조선후기 , 경상도>경주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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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정회(李庭檜)
조선 선조(宣祖)~광해군(光海君) 때의 문신ㆍ학자. 본관은 진보(眞寶). 이황(李滉)의 문인으로 사헌부 감찰(司憲府監察) 등을 지냈으며,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공을 세운 뒤에 귀향하여 지남서당(芝南書堂)을 짓고 후진교육에 힘씀.
1542~1613 한국>조선후기 , 경상도>안동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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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준(李埈)
조선 선조(宣祖)~인조(仁祖) 때의 문신ㆍ학자. 본관은 흥양(興陽). 유성룡(柳成龍)의 문인으로, 남인(南人) 세력을 결집하고 여론을 주도함. 임진왜란(壬辰倭亂)ㆍ정유재란(丁酉再亂)ㆍ정묘호란(丁卯胡亂) 때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함.
1560~1635 한국>조선후기 , 경상도>상주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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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지렴(李之濂)
조선 현종(玄宗)~숙종(肅宗) 때의 문신ㆍ학자. 본관은 함풍(咸豊). 김집(金集)ㆍ송시열(宋時烈)의 문인으로, 학문이 뛰어나고 시와 글씨에 능하였으며, 흡곡 현령(歙谷縣令) 등을 지냄.
1628~1691 한국>조선후기 , 전라도>함평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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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천상(李天相)
조선 인조(仁祖)~숙종(肅宗) 때의 학자. 본관은 전의(全義)로, 통덕랑(通德郞) 이군정(李君靖)의 아들. 배유장(裵幼樟)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정통함.
1637~1708 한국>조선후기 , 경상도>영천(榮川) , 인명>문사>학자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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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현익(李顯益)
조선 숙종(肅宗) 때의 문신ㆍ학자. 권상하(權尙夏)ㆍ김창협(金昌協)에게서 배우고, 생원시에 장원했으나 향리에 묻혀 학문에 힘씀. 학덕이 높아 세자시강원(世子講院)의 왕자사부(王子師傅)ㆍ진안 현감(鎭安縣監) 등을 지냄.
1678~1717 한국>조선후기 , 서울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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한원진(韓元震)
조선 숙종(肅宗)~영조(英祖) 때의 문신ㆍ학자. 본관은 청주(淸州). 권상하(權尙夏)의 문인으로, 이간(李柬)과 인물성동이론(人物性同異論)의 논쟁을 벌여 인물성이론(人物性異論)을 주장함. 영릉 참봉(寧陵參奉) 등을 지내고, 저서로 《남당집(南塘集)》이 있음.
1682~1751 한국>조선후기 , 충청도>결성ㅣ서울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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허강(許橿)
조선 명종(明宗)~선조(宣祖) 때의 학자. 본관은 양천(陽川). 좌찬성(左贊成)을 지낸 허자(許磁)의 아들로, 정작(鄭碏)ㆍ이지함(李之菡)ㆍ양사언(楊士彦) 등과 교계(交契)가 깊었음. 미수(眉叟) 허목(許穆)의 조부.
1520~1592 한국>조선후기 , 경기도>양천 , 인명>문사>학자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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허격(許格)
조선 후기의 학자. 본관은 양천(陽川). 이안눌(李安訥)에게 수학하였는데 스승이 죽은 후 심상(心喪) 3년을 지내고 김상헌(金尙憲) 문하에서 종유(從遊)하였음. 병자호란(丙子胡亂)이 굴욕적인 강화로 끝나자 통곡하고 학문을 그만두었음.
1607~1690 한국>조선후기 , 충청도>단양 , 인명>문사>학자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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허균(許筠)
조선 선조(宣祖)~광해군(光海君) 때의 문신ㆍ학자ㆍ문인. 본관은 양천(陽川)으로, 유성룡(柳成龍)ㆍ이달(李達)의 문인. 이이첨(李爾瞻)과 결탁하여 폐모론(廢母論)을 주장하였으며, 반란을 계획하다 탄로되어 참수형을 당함. 명문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며, 우리 나라 최초의 소설인 《홍길동전(洪吉童傳)》을 씀.
1569~1618 한국>조선후기 , 경기도>양천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문사>문인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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허목(許穆)
조선 인조(仁祖)~숙종(肅宗) 때의 문신ㆍ학자. 본관은 양천(陽川). 정구(鄭逑)의 문인으로, 예송(禮訟) 논쟁에서 남인(南人)을 주도하며 송시열(宋時烈)의 서인(西人)과 대립함. 사상적으로 이황(李滉)ㆍ정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(李瀷)에게 연결함.
1595~1682 한국>조선후기 , 경기도>연천ㅣ서울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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홍가신(洪可臣)
조선 선조(宣祖)~광해군(光海君) 때의 문신ㆍ학자. 본관은 남양(南陽). 민순(閔純)의 문인으로, 이몽학(李夢鶴)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(淸亂功臣)에 책록됨. 이기일원론(理氣一元論)에 입각하여 노장(老莊)ㆍ불교(佛敎)를 비판함.
1541~1615 한국>조선후기 , 경기도>남양 , 인명>기타인명>공신ㅣ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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홍대용(洪大容)
조선 영조(英祖)~정조(正祖) 때의 문신ㆍ학자. 본관은 남양(南陽). 북학파(北學派)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 박지원(朴趾源)ㆍ박제가(朴齊家) 등과 교유하고, 지전설(地轉說)을 주장하는 등 조선 후기 과학사상의 발전에 공헌함.
1731~1783 한국>조선후기 , 서울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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홍만종(洪萬宗)
조선 숙종(肅宗)~영조(英祖) 때의 문신ㆍ학자. 본관은 풍산(豐山). 정두경(鄭斗卿)의 문인으로, 김득신(金得臣)ㆍ홍석기(洪錫箕) 등과 교유하고, 첨지중추부사(僉知中樞府事) 등을 지냄. 학문과 문장에 뜻을 두어 역사ㆍ지리ㆍ설화ㆍ가요ㆍ시 등의 저술에 전념함.
1643~1725 한국>조선후기 , 서울 , 인명>문사>학자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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홍석(洪錫)@조선후기
조선 인조(仁祖)~숙종(肅宗) 때의 문신ㆍ학자. 본관은 남양(南陽). 김상헌(金尙憲)의 문인으로, 병자호란 이후 태백산(太白山) 춘양(春陽)에 은거하여 강흡(姜洽) 등과 함께 ‘태백오현(太白五賢)’으로 불림. 후에 세자익위사 사어(世子翊衛司司禦)를 지냄.
1604~1680 한국>조선후기 , 경상도>안동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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홍우정(洪宇定)
조선 광해군(光海君)~인조(仁祖) 때의 학자. 본관은 남양(南陽). 한성 서윤(漢城庶尹) 홍영(洪榮)의 아들로, 병자호란 때 태백산(太白山) 춘양(春陽)에 은거하여 홍석(洪錫)ㆍ정양(鄭瀁)ㆍ강흡(姜恰)ㆍ심장세(沈長世) 등과 함께 ‘태백오현(太白五賢)’으로 불림.
1593~1654 한국>조선후기 , 경기도>남양 , 인명>문사>학자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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홍지성(洪至誠)
조선 선조(宣祖) 때의 학자. 본관은 남양(南陽)으로, 여경(餘慶) 홍유손(洪裕孫)의 아들. 사화로 고초를 겪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관직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여 학문에 매진하고 후진교육에 힘썼으며, 특히 고문에 정통했음.
1528~1597 한국>조선후기 , 경기도>남양 , 인명>문사>학자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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황윤석(黃胤錫)
조선 영조(英祖)~정조(正祖) 때의 문신ㆍ학자. 본관은 평해(平海). 김원행(金元行)의 문인으로, 종래의 이학(理學)과 서구 지식의 조화를 시도함. 《이재유고(頤齋遺藁)》에 실린 운학(韻學)에 대한 연구는 국어학사의 연구대상이 됨.
1729~1791 한국>조선후기 , 전라도>흥덕 , 인명>문사>학자ㅣ인명>관인>문신